2007년 12월 3일 월요일

서로 함께 진지하게..


지구촌 생성 이래 최악의 영적 혼동기인 이즈음..
참으로 성경적인 바탕 위에서 진정한 신학 담론이 이뤄져야 함을 절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뱀과 같은 슬기, 비둘기 같은 순결과 함께 학자와 같은 혀를 주십니다.

특정 신학의 틀에 오래 갇혀 있기 보다 성경을 우위에 놓고 말씀에 복종할 수 있는 한 도구로서의 신학을 여기서 함께 말해 봅시다!

관심 있는 모든 분들의 폭 넓은 참여를 희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개혁가들이 오해한 마리아


김삼

(사진은 루터 부부의 무덤과 개혁가들의 초상화)

'성탄절' 시즌이 다가 오면 큰 관심사 하나가 예수님의 육친인 어머니 마리아다. 탄생 드라마 주역의 한 명인 데다 안 그래도 카톨맄 측이 '흠숭'하고 지대하게 부각시키기 때문.

카톨맄은 아울러 어른 예수 아닌 아기 예수를 매우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성탄절만 아니라 평소에도 '베이비 지저스'로 늘 머물러 주길(?) 바라는 듯한 인상도 언뜻언뜻 든다. 제대 한 가운데 '감실'에다 성체를 모셔 두고 매 미사 도중 성체성사 때는 예수님의 '몸'이 들어 간 원형 면병, 즉 성체를 모셔서 "먹기" 때문(=영성체)이다.

미상불, 웬만한 중세 성화들을 들여다 봐도 마리아는 으레 성큼 큰데 아기 예수는 자그마한 모습으로 마치 엄마의 둘러리를 선 듯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동방 정교회 측도 '테오토코스' 라며 신모로 받든다. 신보다 신모가 더 중요하단 뜻인가? 언제나 '빅 마마'에 '미니 지저스'이길 바라는가?

아무러나 여기서는..카톨맄 아닌 개혁가들의 마리아관을 좀 살펴 보련다. 한 가지 미리 귀띔할 사항은 이 글은 개혁가들의 지대한 업적을 단순히 깎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카톨맄 사람들도 바로 개혁가들의 이런 약점 내지 자신들과의 공통분모(?)를 기독교 개혁 측의 입장을 되도록 흐려 놓고 폄하하고 느슨하게 하는 데 악용하기 때문이다. 또 안티 기독인들도 대동소이한 입장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늘 개혁가들보다는 더 성경적인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말을 좀 바꾼다면, 마리아관에 있어 특히나 개혁가들의 생각보다 성경을 더 붙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르틴 루터의 마리아 관

1. '신모'

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는 마리아에 대한 존숭심이 대단했다. 마리아에 관한 한 루터는 기독교보다는 카톨맄 쪽에 더 가깝다. 그는 죽기까지 마리아가 신모 즉 '하나님의 어머니'였다고 확신했다.

"그 분은 사람의 어머니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어머니로 [올바로] 불렸습니다..마리아님은 실제로 참되신 하나님의 어머니임이 확실합니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의 저작들, 바이마르 판/영문. J. 펠리컨 편집, 컨콜디아/세인트루이스/제24권/107쪽. [ ]표는 본 필자의 것.)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의 아들이 나의 유일한 아들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님은 신모님(하나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요한복음 강해설교에서, 1537~39년).

"하나님의 신성은 마리아님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이 마리아님에게서 나셨다고, 하나님은 마리아님의 아들이며, 그래서 마리아님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그 분은 참된 신모님이시며 하나님의 '배태자'이십니다. 마리아님은 하나님께 젖을 먹이셨고, 흔들어 재우셨고, 즙과 국물을 요리하여 먹이시고 그밖의 것을 돌보셨습니다." (공의회와 교회에 관하여, 1539년).

2. '영원한 처녀성'

루터는 또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설을 믿었다. 그는 갈라티아서 4:4을 크리스토가 "오직 여인에게서만" 태어날 것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이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이면서 아직도 동정녀라는 신조입니다."(같은 책 제11권/319~320쪽 참조).

또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수님만이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단정한다. 즉 마리아는 평생 다른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리스토님은..마리아님의 유일한 아들이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그 분 밖엔 다른 자녀를 낳지 않으셨습니다..'형제들'은 사실 여기서 '사촌들'을 뜻합니다. 성경이나 유대인들은 언제나 사촌들을 형제들로 부릅니다."(요한복음서 강해설교, 1~4장에서, 1537~39년)

"그 분, 크리스토, 우리의 구세주는 마리아님의 처녀 자궁 속의 진짜 자연적인 열매입니다..이것은 인간의 협조 없이 된 것이며, 그 분은 그 이후로도 동정녀로 남았습니다."(같은 책)

이게 말이나 되는가? 미안하지만, 참 상식 이하의 발상이다. 아니 처녀가 애를 배고 낳으면 그 때부터 엄마지 무슨 처녀란 말인가?! 눈 가리고 아웅 격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마리아가 열 달 동안 아기를 배고도 여전히 처녀의 증거를 지니고 있었다지만 아기를 낳는 순간부터는 완전히 처녀가 아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초자연적으로 잉태했다고 해서 언제나 이 자연법칙에서 예외란 법이 있는지?

뿐만 아니라 성경은 여러 모로 마리아-요셒의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카톨맄 적인 마리아/요셒 영원처녀성 이론은 진리라기보다 전설이나 신화에 더 가깝다. 도대체 마리아-요셒이 영원히 처녀/총각(또는 생과부/생홀아비)으로 남겨 놔야 할 까닭이 뭔가?! 여기 카톨맄 측의 숨은 어젠다가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상징적 처녀성이 기독교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 마리아의 처녀성은 단지 예수 크리스토가 남성의 씨 아닌, 오직 성령님의 권능으로 잉태됐음을 밝히는 차원으로 그쳐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루터는 과연 정신 있는 사람인지, 과연 '신학자'인지 어리벙벙해진다.

3. 마리아 자신의 무원죄잉태

루터는 또 마리아 자신의 '무원죄잉태'(Immaculate Conception)를 믿었다. 한국 카톨맄에서 '무염시태'라고 하는 이 개념은 마리아가 원죄로부터 자유로웠다는 발상. 그런데 사실 카톨맄에서조차도 결정적으로 교리화된 것은 1854년이었음을 볼 때, 루터는 마리아의 영적 순결을 믿어도 너무 믿은 듯 하다.
루터 연구학자 아터 핖콘(세인트루이스컨콜디아신학교)에 따르면, 루터는 죽기까지 평생 이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루터도 마리아의 신적인 모성, 영원한 처녀성, 무염시태를 믿었던 것이다. 핖콘 역시 루터 물을 엄청 먹었는지 열성적으로 이 교리를 따른다.

"그러나 다른 잉태, 즉 그 혼의 주입은 -경건하고 적절하게 믿어지기를- 어떤 죄도 없었고 그래서 그 혼이 주입될 동안 그는 동시에 원죄로부터 깨끗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거룩한 혼이 주입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의 바로 첫 순간에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1527년 12월[?] '성모 수태의 날' 기념 설교에서)

"그 분(마리아)은 은총이 가득하시며 전혀 죄가 없으시니..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선한 것으로 그 분을 가득 채우고 모든 악을 그 분에게서 없앱니다."(1522년 개인 소기도서에서 )

만약 마리아에게 전혀 죄와 악이 없었다면 왜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던가?

"..내 마음이 하나님 나의 구주(Savior)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뤀 1: 47)

마리아가 전혀 무죄무흠하다면 구주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는 얘기이며, 이 방면에서 역사 속의 인간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과 동등하다는 얘기 밖에 안 된다. 성경은 오직 예수 크리스토만이 무죄하시며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이라고 했다(히 4:15, 페트로A 1:19). 그밖에 그 누구에게도 그런 표현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루터는 1533년 가족 성탄절 설교에서도, 1545년 로마 교황청에 항거하는 설교에서도 이 사상을 설파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이 교리가 모든 신자들에게 강요돼야 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성경에 그렇게 두드러지게 공적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신념은 그의 '오직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했다.

4. 마리아 승천설

루터는 또, 비록 신조로 만들진 않았으나 마리아 승천설을 믿고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 승천일 축제는 강력히 비판했다. 승천축일 설교로서는 마지막인 1522년 8월 15일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정녀 마리아님이 하늘에 계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셨는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성령께서 이에 관해 아무 것도 말씀해 주시지 않으니 우리는 그것으로 아무 신조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 님이 크리스토 안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신자면 누구나 그렇듯 마리아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루터가 위의 뒷 부분에서 시사하려던 것은 단순히 마리아의 영혼만을 언급한 것은 아닌 듯.
아마도, 마리아 승천설을 믿는 루터와 수많은 카톨맄들은 휴거의 날에 마리아의 몸이 땅에서 부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테살A 4:15,16)!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믿는다.

5. 마리아 찬미와 존숭

루터는 마리아를 지극히 존숭하는 듯 하다. 마땅히 "존숭 받을 분"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성모축일'에 관한 설교에서 그랬다.

"마리아님 존숭은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분은 지고의 여성이며 크리스토 다음으로 기독교의 가장 고상한 보석입니다. 고귀함, 슬기, 인격화된 거룩함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 분을 높여도 모자랍니다. 영예와 찬양이 그분에게, 크리스토와 성경에 손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돌려져야 마땅합니다."(1531년 성탄절 설교)

루터는 또 다음과 같이 마리아에게 직접 말을 건다.

"님[2인칭] 같은 여성이 없습니다. 님은 이브나 사라 이상이시며 모든 고귀함, 슬기, 거룩함보다 더 복되십니다."(마리아의 엘리자벹 방문 축제일 설교, 1537)

루터는 전통적인 카톨맄 마리아 중재설을 믿진 않았으나..마리아의 '중재적 역할'을 전혀 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그니피카트(루카복음 1:46~55에 있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틴어 마그니피카트)'로 시작되는 마리아님의 찬양)에서 마리아님 자신이 원하시고 표현하신 대로 마리아를 높여야 합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행적을 인하여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마리아님께 대한 진정한 찬미는 곧 하나님께 존영과 찬미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마리아님은 아무 것도 그 분 자신을 위하지 않고 크리스토를 위했습니다..마리아님은 우리가 그 분께 가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기를 원하십니다." (마그니피카토 해설, 1521년)

다음은 루터가 1546년 비텐베르크에서의 마지막 설교 도중에 한 말이다.

"크리스토만 존중 받을 분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신모님이 오히려 존중 받지 말아야 합니까? 이 분은 뱀의 머리를 밟아 으스러뜨린 여인이십니다. (마리아에게) 우리를 들으소서! 님의 아드님은 님의 그 무엇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위에서 루터는 세 가지 오해를 했다. 1. 예수님 못지 않은 즉 예수님과 거의 대등한(?) 존중을 신모가 받아야 한다는 주장, 2. 뱀의 머리(싸탄의 권세)를 밟은 분은 뱀에게 발꿈치를 상하신 예수님인데도 인간 마리아가 그렇다는 주장(창 ), 3. 마리아에게 직접 기도 내지 대화를 시도한 것 등. 이 모두가 비성경적이다.

마리아는 메시아의 회임/탄생을 도운 믿음의 여인, 복스러운 여성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마리아를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위탁하는 등 끝까지 돌보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죄인이었고 따라서 구주 예수님의 구속/구원의 대상이었다. 마리아는 심지어 한때 온 가족과 함께 예수님을 미치광이로 생각하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예수님이 뱀 즉 싸탄에게 발꿈치를 상하셨음은 고난을 상징한다. 따라서 뱀의 머리를 밟으셨음은 부활과 승리를 상징한다. 뱀을 밟는 권세는 주님이 부활/승리하심으로써 교회 전체에 주어졌지,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마리아/성인/선조 등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천사들도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은 이런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해야 한다.

6. 교회의 영적 어머니?

루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마리아를 모든 신자들의 '영적 어머니'로 추켜 올린다.

"사람이 그런 '보화'를 높여 드릴 수 있음은 하나님의 큰 위로와 과분한 선입니다. 마리아님은 인간의 참 어머니, 크리스토는 그의 형님,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이십니다."(1522년 성탄절 설교).

"마리아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물론 크리스토 한 분만이 그분(=마리아)의 무릎에서 길러졌지만..그 분(=예수님)이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 분의 상황에 처해야 합니다. 그 분이 계신 곳에 우리 또한 있어야 하고 그 분이 지닌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돼야 합니다. 그 분의 어머니 역시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1529년 성탄절 설교. 괄호 속 설명은 본 필자의 것).

그러나 루터는 마리아의 주님과의 '동등성', 예수님의 구주로서의 유일충족성을 마리아에게 넘기는 등의 잘못된 경건관습을 철저히 단죄했다. 또 기도 때 '아베 마리아'의 사용을 권장했다. '아베 마리아'를 반대한 게 아니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기를 경고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루터는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

"든든한 믿음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위험성 없이 '찬미 마리아님'(아베 마리아)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누구나 구원에 대한 위험 없이는 '찬미 마리아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1523년 3월 11일 설교)

"우리의 기도엔 신모님을 포함시켜야..아베 마리아는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일러줍니다: '아베 마리아, 은총이 가득하신 분. 주님이 님과 함께 하십니다. 여인들 중 가장 복되셔라! 복되셔라, 님의 태의 열매인 예수 크리스토! 아멘' 이 말들은 기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찬양과 영예에 관한 것입니다..우리는 아베 마리아를 묵상으로 하나님이 그분꼐 주신 은총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각 사람이 그 님을 알고 존중할 수 있게 기원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신앙이 없는 사람은 아베 마리아를 말하기를 삼가야 합니다."(개인기도서, 1522년)

위에서 루터는 마리아를 존숭함이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가당찮은 등식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성인들의 중재와 성인들에 대한 기원을 부인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조직적인 가장 초기 신조와 일치한다.

이상과 같은 루터의 마리아관은 그의 후예들인 현 루터교가 대부분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장 칼뱅

칼뱅은 루터보다는 훨씬 성경적인 마리아관을 지녔지만,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을 부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마리아에게 쓴 가장 흔한 용어가 '거룩한 동정녀'.

"엘리자벹(침례/세례 요한의 어머니)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불렀습니다. 까닭은 크리스토의 두 본성(신성+인성) 속의 격(person)의 합일은..마리아의 태 중에 배태된 필사의 인간이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칼뱅은, 연상의 친척인 엘리자벹이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부른 데 대해 지나치게 비약시켜 가는 성향이 보인다. 예수님의 신성+인성 합일은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지 마리아의 '태의 능력'이 아니다.

특히 다음에서 칼뱅은 전적으로 성경을 오해했다!

"헬비디우스는 너무 무지했음을 스스로 드러냈습니다. '크리스토의 형제들'이라는 몇몇 성구들이 있다고 해서 마리아가 여러 아들을 뒀다고 말했습니다." 칼뱅은 '형제들'이라는 말을 유대 관습에 따라 사촌, 친척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칼뱅이 잊고 있는 것: '형제들'은 친척 이전에 우선 친형제들부터 가리킨다는 사실, 그리고 마리아는 여느 여성과 (달리 가 아니라) 다름없이 엄연히 성욕을 가진 여인으로서 남편 요셒과 성생활을 하여 계속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 그래서 성경은 형제들뿐 아니라 예수님의 누이들까지 언급했다는 사실 등.
그런데도 칼뱅이 '형제들'을 사촌/친척으로만 이해한 것은 잘못이며 더구나 헬비디우스를 '무지하다'고 판단한 것도 너무 섣불렀다. 오히려 자신만 스스로 무지해지고 만 셈이 됐다.

우리가 풀어야 할 오해는, 하나님은 마리아/요셒이 예수님 출생 후에까지도 영원히 처녀성을 '간직'하길 원하실 이유가 없다는 점. 이 점은 복음서 기자의 뉘앙스로도 충분히 느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태복음서 1:18).

윗 구절에서 '동거하다'(=쉬네르코마이)는 성생활을 포함한 모든 부부 생활 패키지를 뜻한다. '동거하기 전에'는 나중 성생활을 포함한 동거에 들어 갔다는 뜻이 된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5).

성경 원문은 명백히 여기서 요셒이 아들을 낳기까지 시한부로 금욕 생활을 했다는 뉘앙스이다! 이제 다음을 보라.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루카 2:7 개역개정)

당대의 과학자인 의사 루카는 위 구절에서 분명히 다른 아들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첫아들'(프로토토코스 휘오스)이란 말을 쓰지 않고 오히려 '외아들/독자'(모노게네스)이라고 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다! 루카는 명백히 예수님 말고도 마리아/요셒 사이에 분명히 딴 아들딸들이 있음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이상 성구들에서 우리는, 성욕이 있는 멀쩡한 사내인 요셒이 예수님 출산 이후 성욕이 있는 멀쩡한 처녀인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을 만한 까닭을 못 찾는다.

요셒이 그럴 이유가 도대체 뭔가? 마리아의 태는 단지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채널로 한 번 사용됐을 뿐, 그 이후는 요셒과 마리아의 자유 소관이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평생 맨 처녀, 평생 맨 홀아비로 남겨두실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요셒은 아직 총각일지언정 아기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이미 처녀가 아니다! 아기를 낳은 여성은 아기를 밴(마리아의 경우 아기를 낳은) 순간부터 '애 엄마'이지 '처녀'일 수가 없다. 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신22:15). 성경을 비합리적 전설이나 신화로 몰아가지 마라!

이런 점에서도..다시 한 번, 카톨맄 지배 계급인 사제들이 마리아/요셒도 자신들과 수사/수녀들처럼 처녀/홀아비로 늙어 갔길 은근히 바라는 심정이 그들의 마리아관, 요셒관에서 드러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아기를 출산하여 처녀성을 잃은 여인을 놓고 마리아만 신격화하기 위해 "한 번 처녀는 영원한 처녀"라고 우기는 것도 우습고, 신모이려면 영원한 처녀여야 한다는 거꾸로 된 신화적 공식도 우습다. 이것은 분명히 신화의 영향이지 성경의 영향은 아니다. 성경은 그런 공식을 말하지 않는다.

좀 발칙(?)한지는 모르나 한 번 이런 상상을 해 보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낳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 그동안 열심히/정성껏 성욕을 꾹꾹 눌러 뒀던 요셒이 슬슬 아내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자 대뜸 물리치며.."아니, 요셒! 감히 무슨 생각을..? 저는 이제 거룩하고 순결한 몸이예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낳은 몸입니다. 그러니 제 몸에 손을 댈 생각일랑 아예 마시고 이제부터 우리는 '고목'이 될 때까지 그냥 남녀유별, 서로 방/방을 나눠 사는 겁니다. 저는 여성이 아니고 당신은 남성이 아니라고 생각하셔요. 참으세요! 못 참겠더라도 끝까지 죽기까지 참으셔야 해요. 나는 메시아의 모친으로서, 당신은 그 남편으로서 길이 길이 하나님 앞에 순결과 절개를 지켜야.."

이게 얼마나 웃기는 얘기인가?! 하나님이 생떼 같은 젊은 부부에게 그러시리라고 생각하는가? 앞으로도 생과부/생홀아비로 살라고? 만약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요셒 부부의 정혼을 허락하셨으며..왜 미리 부부 인연을 취소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냥 마리아만 홀로 아기를 낳으면 될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카톨맄 사제들은 "무슨 소리? 아니 우리도 참고 우리 수사/수녀들도 다 참고 있는데..파울 사도님도 참았는데 마리아/요셒님이라고 못 참을 게 뭔가? 다 참아야지!" 할지도 모른다. 누가 그랬는가? 하나님이 누구더러 다 참으라고 하셨는가?

요셒은 카톨맄 측의 기대처럼 영원한 '혼후노총각생홀아비'로 살아가야만 할 '성소'(聖召)를 받지 않았다. 만약에 요셒/마리아가 영원한 처녀성을 지켜야 할 일이었다면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고지'란 것을 할 때 분명히 최소한의 참고성 조언을 했었어야 했다. "두 분..앞으로 성생활은 결코 안되니 생각도 마시고, 알아서 하시와요~!"- 이런 귀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구절은 눈 씻고 봐야 '수태고지' 속엔 없다.

그래도 여전히 마리아/요셒의 영원한 처녀성을 믿고 싶은 독자들은 자신들이 시범적으로 그렇게 살아 보도록 하되, 애꿎은 마리아-요셒은 생과부/생홀아비로 몰아가지 말기를 바란다.

칼뱅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마리아를 그 분의 아들의 어머니로 택하시고 지정하심에 있어서 그녀에게 최고의 영예를 하사하셨음은 부인될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성경은 마리아보다는 사도 파울이나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더 높이고 있지 않을까..? 앞서 간 신앙위인들의 박물관 같은 히브리서 11장의 명단에서도 마리아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생략했겠지만 말이다. 왜 행전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중 12 사도나 7집사들 외에 마리아를 여성지도자로 꼽지 않고 있는가?

울리히 츠빙을리

또 다른 개혁가인 츠빙을리는 우선 예배부터 당대의 카톨맄 미사를 그대로 본받아 '주기도문'으로부터 시작, 바로 그 다음에 아베 마리아를 낭송했다.
그의 마리아관을 소개해 보면..

"아무 피조물에게도 속하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 주어졌으니 곧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나는 마리아가, 복음서 말씀에 따르면, 한 순결한 처녀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낳아 주셨고 어릴 때나 그 이후나 영원히 순결한 때묻지 않은 처녀로 남아있었다고 굳게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어머니, 항상 순결하시고 무죄하신 동정녀 마리아를 지극히 존중하는 바입니다."
"크리스토는..가장 덜 더럽혀진 처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 거룩한 아드님은 거룩한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는 것이 적절합니다."
"크리스토의 영예와 사랑이 사람들 가운데 늘수록 마리아에게의 존중과 영예도 늘어야 합니다."

이같은 츠빙을리의 생각도 역시 비합리적, 신화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는 또 출 4:22을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 교리를 방어하는 데다 써 먹었는데 전혀 걸맞지 않은 풍유적 해석이다.
결국 츠빙을리는 본심인지 아닌지 모르게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데이빋 라잍 교수(에딘버러 대 뉴칼리지/교회사)는 그가 엮은 책 '하나님께 선택받아-복음주의 관점에서 본 마리아'(런던 마셜 피커링, 1989년)에다 이렇게 썼다. "현대 신교도들에게 가장 놀라울 한가지는 마리아의 지속적인 처녀성에 관한 개혁가들의 거의 보편적인 수납, 그리고 마리아가 죄인이라는 선언에 대한 폭넓은 거부감이다."(180쪽)

라잍은 이어서 "개혁가들의 이런 마리아관 가르침이 신교 교회에 이식되지 않은 것이 은총의 섭리인지"를 묻고 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2007년 12월 1일 토요일

성령 은사 시대, 물 건너 가?



김삼

설교자/목회자들의 성경관은 퍽 다양하다. 성경도 하나, 그 저자이신 성령님도 한분이신데 설교자들의 견해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이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면, 저 목사는 달리 반응한다. 언론을 통해 그들의 설교를 읽거나 들을 때, 그 상이성의 큰 폭을 대강 느낄 수 있다.
이런 폭 넓은 상호이질성은 주로 신학교 배경이나 독서 체험, 또는 어떤 계기 때문에 형성된 서로 다른 신학체계 탓이다. 여기에다 일반 교우들 견해까지 보탠다면 엄청난 카오스가 배가된다. 그래서 특정교리 문제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성도에겐 자칫 혼동과 공허의 세계, 더 나아가 공포의 세계이기가 쉽다.

필자의 딴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예로부터 현재까지 교계 안에서 날카로운 대립각을 이뤄 온 공통 이슈 한 가지가 성령론, 그중에서도 은사론, 그 가운데서도 방언론이다. 이런 주제 하나씩만으로도 긴 글을 쓸 수 있겠지만, 여기선 한 가지 물음에 답을 붙여 보련다.
물음이란, 과연 성령의 이적과 표적, 은사가 초기교회 시대로 끝났고 이젠 더 존재하지 않는가 란 것이다.

많은 목회자/설교자들이 “이적과 은사는 사도 시대에만 있었고 성경계시가 완성된 이제 더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주일마다 한 두 명 아니 몇 명씩은 그런 설교들을 할 것이다. 특히 전통주의/진보주의적인 신학교에서들 그렇게 배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목회자의 교회나 신학교에선 성령의 이적과 은사가 거의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까닭은 간단하다. 원하지 않는 곳엔 나타나 주질 않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강력하시면서 온유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를 짓눌러 가면서 일부러 자신을 나타내시진 않는다. 기꺼이 환영하는 곳에만 풍성히 임하신다.
이런 차이 때문에, 은사가 나타나는 성도들은 걸핏하면 기성교회에서 왕따를 당한다. 심지어 그런 현대의 은사는 모두 성령 아닌 ‘악령’의 것이요 따라서 이단’이라고까지 치부된다. 자연히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런데 아까 위의 그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신학자들이 생각해 낸 학적 가설이고 억설이지, 성경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성경 구절까지 인용해 가며 그런 부정적인 주장을 한다면, 성경을 '삐딱'하게 오해하고 오용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필자가 믿는 성령께선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악이다. 그런데 수많은 신학자들과 그 제자들인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믿음 대신 신학으로 성경을 보고 푼다. 그래서 잘못되고 비뚤어진 신학 정보들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대신한다.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은 성령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신학자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아무튼 그런 신학자나 그런 설교자들은 한 마디로 영적 분별력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신들이야 스스로 투철한 신앙인, 투철한 분별자로 여기겠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딴 건 다 믿는데 오늘날의 성령의 권능 사역은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비신자와 별 차이진 배 없단 얘기다.

여기서 잠깐 딴 얘긴데..대/중/소 교회를 막론하고 목회자들이 우려하는 한 가지는 ‘내 교인’을 저 교회로 뺏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 교회에 갖출 것을 다 갖췄더라도 뭐 한 가지가 부족하면 그런 생각을 쉽사리 갖게 된다. 그 ‘한 가지’의 하나가 구원과 거듭남, 성령의 은사와 기적, 신유 등 초자연적 이슈다.

가까운 이웃 교회엔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나는데 우리 교회에 안 나타날 경우 왠지 불안해진다. 그럴 경우 목회자의 일차적인 방편은 으레 '불건전한 신비주의’또는 ‘가짜(의 성령역사)’ 운운 하는 비판과 단죄다.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자체보다는 자기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지식을 써먹는다.
그런 설교자들이 상투적으로 애용하는 성경구절이 바로 다음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날 내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 이름으로 악령들을 내쫓고, 또 주님 이름으로 숱한 권능 사역을 행치 않았습니까?’ 할 텐데, 나는 그때 그들에게 선언할 것이다. ‘난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 ’.”(마태 7:22,23 사역)

위 성구를 들어 현대의 성령 이적과 은사를 백안시하는데 전형적인 눈 가리고 아옹 식 인용이다. 한 번 자세히 살펴 보자.

첫째로, 주님은 모든 예언/신유/축귀/권능(이적과 은사) 사역자들을 싸 잡아 저주하신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 즉 불법을 행하는 자도 있고 정상적인 사역을 하는 자도 있다는 얘기다.
만일 그렇지 않고 단순히 모든 권능 사역자들이 다 ‘불법자’라면, 주님의 제자들도 포함돼야 하며 누구보다 주님 자신이 포함돼야 한다. 주님과 사도들이 모두 큰 권능 사역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맨날 말씀 전하고 맨날 예언하고 맨날 병 고치고 맨날 귀신 쫓고 맨날 은사를 활용했다.
안 그런가?

안 그렇다면 왜 성령께서 교회에 권능과 은사를 주셨단 말인가? 모두 불법자로 만드시려고? 그래서 권능을 행하는 자마다 다 지옥 보내시려고? 권능사역을 하는 자들을 모두 다 지옥으로 몰아대는 그런 하나님은 난 믿지 않으련다.
그렇다면, 큰 권능사역을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누굴까?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스스로 가로채는 사역자다.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둘째로 위 성구엔 불법으로 ‘예언’하는 자들이 우선적으로 포함돼 있다. 성령의 권능을 받지도 않고, 또 받아도 써 먹지도 않고 주님 이름으로 ‘예언’한다는 많은 설교자도 이 항목에 든다. 즉 자신을 먼저 돌아 보지도 않고 남을 비판하고 단죄하기에 바쁜 설교자도 여기 포함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단 얘기다.

물론 진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 사이비/이단도 없진 않다. 그러나 되풀이하지만, 그들의 하는 짓거리 즉 열매를 보면 안다. 그보다는 그런 ‘단죄’를 더 조심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진짜 불건전한 신비주의도 사이비이지만 진짜 성령의 역사를 ‘가짜’로 단죄하는 것도 사이비일 수 있기 때문.

단적으로 말해서 당신 자신이 성령의 초자연적 체험을 한 적이 없다면 어떻게 ‘불건전한 신비주의’라고 쉽게 분별하나?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물어 보라. 당신의 그 언질은 단지 이웃교회 죽이기 차원에서인가 아니면 진정 하나님의 교회를 염려하는 충정 차원에선가? 그 ‘충정’은 착각에선가 바른 판단에선가.

물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연 이웃교회의 저 현상이 진짜 성령의 역사일 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 즉 사탄일 지 바로 가름할 만한 충분한 영적 판별력이 당신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입을 다물어라. 하나님께 다 맡기고 염려를 걷어 제쳐라. 성령 체험이 없거나 부족한 자신이나 염려하든지 그리고 당신의 할 일만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당신도 그 교회처럼 은사와 이적을 간구하면 되지 않겠는가?

당신에게 은사와 이적이 나타나면, 그걸 보고 놀란 교인들이 도망갈 것이 우려되는가? 거기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알토란 같은 교인 또는 돈 많은 교인들을 잃을까 우려되는가? 아니면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그 성령 충만한 교회를 죽여야겠는가? 그럼 목회를 관둬 버려라! 그것이 더 진솔한 행동 방식일지 모른다.

성경은 100% 믿어야 한다. 70% 정도 믿으면서 100%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99.99%도 100%는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2000년전 오순절 그 날 땅에 내려 오신 성령께서 현재까지 지상에 존재해 계시면서 계속 사역하신다고 여러 모로 밝혀 준다. 그 때 오신 성령님이 사라지시지 않았다.

물론 성령께서 그 전엔 지상에 오신 적이 없다는 건 아니다. 성령은 요단강가에서 침례받으신 예수 크리스토께 비둘기처럼 온전히 임하여 물 붓듯, 기름 붓듯 부어졌다. 또 더 오래 전 구약 예언자/왕/사제들, 사사나 원로 등 정치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임하셨다. '부분적'이란 말은 기름부음을 통한 부분적 권능과 은사를 주셨지만, 성령께서 그들 속에 온전히 내재하진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약시대/교회시대/성령시대의 시작인 오순절 이후부터는 성령께서 지상교회에 임하여 계시면서, 믿는 자들의 구원 사역과 거듭남과 온전한 내주(인간 속에 계심), 이적과 기사, 은사와 성령의 열매로 크리스토가 교회의 머리이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그 성령님은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 성자 크리스토의 영이시다.

사도들이 체험했던 이적/은사/신유 등 초자연적인 역사는 그러므로 오늘날도 고스란히 존재하고 나타난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성령은 계속 계시며 사역하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지금도 과거와 동일하게 사역하시길 원하신다. 예수 크리스토는 어제나 오늘, 앞날에 영원히 한결 같으시기 때문이다. 어제 일하시던 주님이 오늘은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현재는 성령의 사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신학도들은 하나님을 ‘반 쪽 짜리’ 신으로 제한하고 있다. 하나님의 손을 묶어 두고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을..?” 할지 몰라도, 인간이 믿음을 화합치 않으면 하나님의 손을 묶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중시하는 나머지 성경 가르침에만 치중하고 성령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반 쪽 짜리 신앙일 수 밖에 없다. 그런 교회들이 주위에 수두룩하다. 아니 대다수다. 그런 교회는 자연히,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교회를 질시하고 심지어 박해하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그럼 초기교회에 넘쳤던 성령의 이적과 은사는 교회에 아직 존재하는가?
그 이전에 먼저 물어 보자. 사도서신들을 읽어 보면, 초기교회 시대도 세상은 오늘날 못지 않게 무척 악했다. 죄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친다고, 초기에 성령의 이적/은사가 필요했다면, 지금처럼 과거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 더 악해진 세상에서 성령의 이적/은사 없이 올바른 복음 전파와 영적 전쟁이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스스로 신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성경 말씀이 완전한 계시로서 존재하기에 더이상 성령의 권능/이적/은사가 필요 없다면, 성령이 쓰신 말씀이 성령님 자신을 대체해 버리고 성령님은 필요 없다는 셈이 된다. 이적과 은사를 나타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성령을 묶어 버리는 셈이다. 그럼 성령은 명목 상의 하나님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독자가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예수님 자신을 보라. 예수님은 성령을 물 붓듯 기름 붓듯 부음 받았기 때문에 온갖 표적과 기사가 가능했다고 성경은 밝힌다. "곧, 하나님이 나자렛 예수에게 성령과 권능으로 기름 부으시자 그 분이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 억눌린 모든 이들을 고쳐 주셨으니, 하나님이 그 분과 함께 하신 때문입니다"(행 10:38/사역).

즉 하나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셨기에 예수님의 사역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것은 물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들도 성령의 권능적 이적과 은사가 나타났기에 사역이 가능했다(행 2:4,43, 4:29,30, 5:30.. 등등).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말씀과 이적이 늘 병행됐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적은 하나님 편에서 말씀을 확증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보자.

“또 그들(제자들)이 나가 어디서나 전파했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일하시어 따르는 이적으로 그 말씀을 확증하셨다.”(맑 16:20)

그런데도 그런 이적과 은사도 없이, 우리가 무슨 대단한 ‘짱’이라고 말씀과 ‘깡’으로만 권능적인 사역이 가능하다는 얘긴가? 너무나 독단적, 편파적인 얘기다. 전통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이 얼마나 우스운 얘긴지 더 깊이 살펴 보자.

예수님 당시에도 구약 성경은 있었다. 또 제자들, 사도들도 구전으로 된 ‘복음서’와 일부 서신서를 보유했다고 봐야 한다. 즉 계시록 같은 후대 기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단지 당대에 아직 없었던 완본 신약 성경을 지금 우리가 갖고있기 때문에 그것 하나로 성령의 이적과 치유, 은사 없이 사역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그런 주장은 ‘신약성경책 절대우상주의’ 내지 신학절대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말씀만을 강조하는 대다수 전통교파 신학교에 성령의 권능과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성령께선 그분을 진정으로 환영하는 곳에만 오신다. 사람들의 의지를 무시하고 아무 데나 찾아오시진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계시시대가 완성됐기 때문에 현대엔 결코 성령의 은사와 이적이 나타날 수 없고 또 나타나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과 그 후학들은, 자신도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않을 뿐더러, 그들이 가르치는 교인들에게도 성령님이 일하실 기회를 막고 있는 거침돌과 장애물 같은 존재다.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격이다. 신학의 틀에 묶인 자신들도 불쌍하지만 그 교인들은 더 불쌍하다. 신학자들이여,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그 다음으로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중요한 가설 한 가지는 성령의 강림, 은사와 이적들이 초기교회에서 ‘단회’로 끝났다는 주장. 소위 ‘단회설’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성령님이 2000년 전에 한꺼번에 권능과 이적, 은사들을 쏟아 주시곤 더이상 그런 역사를 하시지 않거나 점점 약화되다가 아예 사라졌다는 설이다.
바꿔 말하면, 초기교회 때 콸콸 흐르던 거대한 오순절 성령의 강물 줄기가 이젠 시냇물처럼 줄어들어 ‘졸졸’ 흘러내리거나 말라 버렸다는 것이다. 이 역시 넌센스다.

요런 가설도 신학자의 눈에 씌운 요상한 선글래스 탓에 나온 헛소리다. 미안한데, 성경은 그와는 정 반대로 얘기한다. 자, 다음 구절을 보자.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 자녀들을 위한 것이며 또한 모든 머나먼 사람들, 그들이 얼마이든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실 만큼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행 3:39)

위에서 ‘머나먼 사람들’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 즉 지리적으로 떨어진 사람들뿐 아니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택한 사람들을 말한다. 즉 오는 세대 중에서 하나님이 부르실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약속된 것이 성령의 선물이란 것이다.

사도 페트로가 위의 말을 할 때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하지 않았다.

“이 (성령 선물의) 약속은 하나님이 택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단, 성령의 이적과 신유, 은사는 빼놓고 말입니다.”

페트로가 군중 앞에 처음 나섰던 그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일부 전통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조용한 성령’이 아니셨다. 페트로와 120성도와 수천명 유대인들이 목격한 그 성령님의 강림은 분명히 “보고 듣는” 모습으로였다. 페트로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른손에 높여지시어, 그 아버님께 성령의 약속을 받아, 그 분(예수님)이 이를 부어주시니 곧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바입니다.”(행 2:33)

초기교회의 증인들이 “보고 들은” 성령 임재의 모습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방언이었다! [‘방언’이란 한자 용어는 지역적 개념이 부가된 잘못된 번역어다. 마치 사투리나 지역언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원어 ‘글로싸’나 영어의 ‘tongues’는 그런 지역적 개념이 포함돼 있지 않다].

사도 페트로는 분명히, 사도행전 10:44에서 [방언=성령부어주심]이란 등식으로 봤다. 다음 구절을 보자.

“페트로가 이 말을 할 즈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페트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부어짐을 인하여 놀랐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리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페트로가 말했습니다. ‘이 분들이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는데 누가 감히 물로 세례/침례 베푸는 걸 막을 수가 있겠소?’”

따라서, 지금도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들리게 확실히 임하시는 성령의 체험을 해야 초기교회 성도들과 우리 사이에 공평한 ‘거래’가 이뤄진다. 물론 믿음 있는 이들에게만 부어 주시는 약속이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늘 한결 같으시기 때문이다. 그 분의 약속도 늘 동일하다.

이런 주님의 약속이 오늘날엔 통하지 않는다는 신학자들은 한 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보려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필자의 은사들도 포함된) 그런 신학자들에게 지금 필자는 “성경을 삐딱하게만 읽지 말고 똑바로도 한 번 읽어 보셔요”라고 권하고 싶다.

신학자들은 과거 초기교회 때(그들 보기에) 시끄러웠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엔 조용해 주길 원한다. 그러니까 조용히 살고 싶은 신학자 기분과 정서에 맞게 성령님과 신자들의 입을 막겠다는 것이 그들의 짧은 생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분 좋으신 날만 해를 돋우시는 게 아니라 매일 어김 없이 해돋이와 해지기를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날마다 태양이 변함 없이 뜨고 지듯, 초기교회의 이적과 신유와 은사는 오늘도 변함 없이 존재한다. 믿음으로 기다리고 바라는 이들에게 나타난다. 성령님은 오순절 이래 항상 계시기 때문이다. 오순절에만 왕창 그리고 살짝 주시고, 현대는 단지 신구약 성경 합본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능과 은사를 싹 거둬 가 버리시는 ‘얌체’같은 성령님이 아니시란 얘기다.

자, 역사적으로 한 번 증명해 보자. 과연 성령의 권능을 초기교회의 120성도에게만 주셨는가?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임하시는가?

  • 초기교회 120명에게 "보고 듣게" 임하신 그 성령님은(행 2:2-4),
  • 그날, 유럽과 소아시아 각처에서 몰려온 3000여 유대인들이
    보고 듣게 부어주셨고(행 2:5-13),
  • 몇 년 후 믿고 침례/세례를 받은 (옛 마술사) 시몬도 눈으로 "보고" 놀란 것이며(행 8:13,18),
  • 훗날 바울이 된 사울도 다마스쿠스 체험 후 받았고(행 9:17. 비교 14:18),
  • 수 십 년 후 페트로가 코르넬리우스 집을 방문했을 때도, 모두 “들을 수 있게” 성령이 임하셨고(행 10:44-46),
  • 수 십 년 후, 아폴로 목사가 돌보던 에페소 성도들도 파울의 안수를 받고 성령의 임하심을 따라 방언과 예언을 했다(행 19:6).

그리고, 그로부터 백년 후..수세기 후..2000년 후도 마찬가지다. 예수 크리스토는 한결 같으시다.
이제 끝으로, 2000년전 오순절날 페트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을 되새겨 보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 내가 나의 영을 모든 이들에게 부어줄 테니
너희 아들들, 너희 딸들이 예언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
또 내 종들과 여종들에게도 그때 내 영을 부어줄 테니
그들도 예언하리.’..”

위의 ‘마지막 때’가 언제라고 생각되는가? 2000년전 오순절만이었나? 오늘날까지인가? 필자가 보기엔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다.
그리고..성령님은 필자에게 감동 주시길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바퀴처럼 함께 간다"고 하셨다. 은사만 갖고 자랑하지 말고, 열매도 맺어야 한다는 얘기다.

기본 논리 차원에서 본 칼뱅주의


김삼

[그림: 장 칼뱅의 모습. 불어로는 '코뱅'(Cauvin), '쇼뱅'(Chauvin). 당대 라틴어로는 '요하네스 칼비누스'로 불렸다. 영어 식으로 "존 캘빈"으로 흔히 불린다. 오른쪽 초상화는 역사상 실물에 가장 가까운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칼뱅주의..솔직히 좀 지겹다. 독자 쪽은 몰라도 필자는 그렇다. "아니, 감히 지겹다니?!" 하고 반신반의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지겨우니 지겹다고 하지 딴 말로 빗겨 가겠는가? 하나님도 나의 지겨움을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자녀가 지겨워하는 걸 들입다 안긴다고 늘 받아 주기 바라는 부모가 있을까?

그렇다고 기독교 교리나 성경말씀까지 지겹다는 얘기는 아니니 안심하라. 필자는 소위 "보수정통" 신학교에 머문 11년간 칼뱅주의 신학만 신물 나게 배웠다. "모탯적"부터 장로교인, 현재도 장로교단에 소속돼 있다. 그러니 필자더러 "칼뱅주의의 '칼' 자도 모른다"는 얘길랑 하지 말아 달라. 물론 그렇다고 칼뱅주의에 '도통'한 건 아니며 그러길 원치도 않는다.

궁금한 것은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도통' 내지 득달하여 불경 외듯 칼뱅/아르미니우스 서적을 완전 암기한 신학도가 과연 몇 분이려나 하는 점이다. 독자의 교회 교우들에게 칼뱅의 방대한 성경주석 전집이나 엄청난 분량의 '기독교강요'는 둘째 치고 칼뱅주의의 핵심 5대 교리(TULIP)를 다 외우고 있는지 물어 본다면 과연 몇 명이나 답하겠는가?
[영어에 익숙해도 책이 없어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칼뱅의 '기독교강요' 영문판을 무료로 참조할 수 있다. 참 편리해진 세상이다. http://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htm]

교인은 그렇다 치고 독자 자신은 TULIP을 줄줄이, 상세히, 막히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가? 독자와 독자의 교회가 능히 그렇다고 치자. 독자 수준의 교회가 몇 %나 되겠는가? 그러고도 감히 '칼뱅주의 교회', 칼뱅주의 교단으로 명실공히 자임할 수 있겠나?
그런 점에서 우리 '-주의자'들 대다수는 알고 보면 가우타마나 보디사트바에 충실한 불도들만큼도 칼뱅이나 아르미니우스에 충실치 못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칼뱅의 교리적 적수였던 아르미니우스도 칼뱅의 성경주석들을 읽고 찬탄했지만 '기독교강요'의 편파성엔 혀를 내둘렀다.[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기독교회사' 제8권 참조] 적을 알기 위해선지는 모르나 아무튼 적수인데도 읽었다는 얘기다.

필자의 말뜻은 칼뱅주의자, 칼뱅주의 교회들을 폄훼하겠다는 게 아니다. 제 아무리 칼뱅/아르미니우스 사상의 '권위자'라고 해 봐야 너나 나나 오십 보 백보, 도토리 키 재기란 얘기다. 그리고 칼뱅주의/아르미니우스에 능통하다고 성경말씀에까지 능통하냐..그도 아닌 것이다.
칼뱅/아르미니우스에 버금가리만큼, 그들의 뺨을 칠(?)만큼 칼뱅/아르미니우스주의로 무장한 신학자보다는 평생 칼뱅주의가 뭔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뭔지 제대로 모르는 "어벙한" 풀뿌리 민초 신자 한 명의 성경말씀 실력이 더 나을 수 없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설혹 칼뱅의 성경주석과 '기독교강요' 전권을 완벽 섭렵 내지 암송하여 기네스 북 신기록에 오른다 해도 성경 66권 필사본을 만든 사람만 못 하다고 생각된다.

더 나아가 성경 말씀보다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도통"함은 위험할 수 있다.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이 아닌 칼뱅/아르미니우스 사상을 읊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입에서 뱉어 냄을 당할 수 없지 않다곤 말 못할 것이다. 칼뱅의 성경주석이나 '기독교강요'가 하나님 말씀 자체는 아니므로 오류가 적지 않음을 칼뱅이 여기 살아 있어도 자인할 것이다.
문제는 "칼뱅님. 님에게 혹 오류가 있어도 우리가 다 덮어 드릴 테니 잠자코 눈만 감고 계십시오!"라는 식의 칼뱅주의 후학과 제자들인 것이다.

자, 그러니 하나님 말씀이 더 높으냐, 칼뱅 사상이 더 높냐 란 유치한(?) 수준의 기본적 명제 앞에서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 속는 일은 없어야 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란 속언도 있다.

성경의 대 명제: 사람들은 다 거짓되나 하나님은 참되시다

성경엔 어떤 말씀도 적당히 거짓말로 '땜질' 하는 곳은 눈 씻고 봐도 없다.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이다. 예수 크리스토는 진리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 쉬운 논리로 근접해 보자.

사람들은 다 거짓되나 하나님은 참되시다.
칼뱅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 불과하다. 김삼도 인간이다.
칼뱅/김삼은 참되지 않을 수 있다. 즉 [최소한] 부분적으로 거짓되다.
독자 자신도 그렇다.

칼뱅을 김삼과 대비한 것은 단지 다같은 인간이라는 전제에서이지 필자가 칼뱅과 견주길 바라서가 아니다. 필자는 [엄마 뱃속을 떠난지 오랜 지금] 칼뱅 수준의 천재가 될 수도 없을 뿐더러 되고픈 맘이 털끝만치도 없다. 단 하나님이 위에서 베풀어 주신 재능을 지녔다는 점에서 '천재'라면 김삼도 천재다. 필자는 다만 오직 크리스토를 본받아 그분의 장성함에 이르고 싶을 뿐. 단지 우리 자신과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자는 얘기다. 예수 크리스토만 바라 보자는 말이다.
부정할 수 없고도 부정해선 안 되는 투명한 논리를 좀 더 진전시켜 보자.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 분의 말씀도 참되다.
칼뱅의 저작물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이상 오점/오류가 있을 수 있다.
성경 말씀에 비춰 볼 때 칼뱅주의엔 오류가 있다.
하나님 말씀보다 더 높아질 수 있는 신학이론은 단 하나도 없다.
칼뱅의 오점/오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거짓이 없는 양, 은연 중 100%
다 옳은 양 주장함은 잘못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칼뱅절대순수론', '칼뱅절대주의'란 있을 수 없다. 그건 한낱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성경은 엄연히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칼뱅은 동기나 과정이야 어떻든 미구엘 세르베토를 화형으로 귀결시켰다. 카톨맄이 개혁가 얀 후스를 화형시킨 후였다. 사료와 문서에 따르면, 칼뱅은 명백히 세르베토를 계획 살인했다. 그러고도 끝끝내 회개는커녕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런 사실을 은폐하려 들어선 안된다. 말씀의 진리와 직결된,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진리에 어긋난 것을 갖고 무조건 덮으려는 것은 사랑도 긍휼도 아닌 불의요 맹종이다. 은폐자, 공범이 되고 싶은가?
칼뱅은 훌륭한 성경 주석가요 신학자였으되 우리와 성정이 같고 대동소이한 평범한 인간이요, 신이 아니었다. 그러니 칼뱅을 우상 숭배하듯, 100% 완벽한 인간처럼 신처럼 오매불망 섬기고 추종할 성격인가? -이것이 이 글의 주된 요점이다.

필자는 시방 칼뱅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칼뱅의 사상 중엔 성경을 뒷받침하는 좋은 주장들이 많다. [그런데 김삼에게도 그런 점은 없지 않다]. 그러므로 칼뱅이 [부분적으로] 뒷받침해 준 예수 크리스토의 진리 말씀 자체에 눈길을 돌리자는 얘기다.

칼뱅 사상보다는 성경에 치중해야 옳다.
칼뱅의 '기독교강요'보다 성경에 더 능통해야 한다.
일반 교인들에겐 칼뱅 교리보다 성경을 열 배나 더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칼뱅교리를 아예 안 가르치고 성경말씀만 가르쳐도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법은 없다.
칼뱅 교리 상당수는 거짓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미니우스주의도 상당량 거짓되다.

착오 없기 바란다. 필자는 지금 신학자마다 철퇴를 가해 모조리 '작살'내려는 음모로 나선 게 아니다. 모든 신학의 유용성을 '무용성'으로 돌려 젖혀 버리는 사이비/이단들의 전철을 밟으려는 게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의 진실무망함(참되고, 망령됨이 없음)과 유일하고 참되신 예수 크리스토의 진리성의 효력을 극대화 하고픈 의도 때문이다.

성경은 무한속죄, 조건부 구원을 말한다


-칼뱅주의 주요 교리 비평 <1>

[시리즈를 시작함에 있어 먼저 몇 가지를 밝힌다. 필자는 장로교인이다. 따라서 칼뱅주의권에 속해 있다. 칼뱅주의는 칼뱅주의를 아는 사람이 비평해야 더 정확하겠기에 감히 나선다. 왜 꼭 칼뱅주의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냐, 제 얼굴에 침 뱉기 아니냐는 물음은 글을 읽어 나가다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사족이겠지만, 이 서론적 내용은 전문, 필자 자신의 오리지널이다. 딴 학자들의 글을 전혀 참조하지 않고 직접 성경 말씀 묵상과 성령님의 감화를 통해 써내렸다. 시리즈 다음 회에서는 다른 학자들도 부분적으로 참조하련다.]

칼뱅주의는 소위 '제한속죄설'(Limited Atonement)을 주장한다. 칼뱅주의 5대 교리 'TULIP'의 가운데 부분을 차지하면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가장 문제성이 심각한 교리다.
[참고로 칼뱅주의 5대 교리는 •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이니셜만 따 'TULIP'으로도 불리며 그래서 때로는 튜울맆 꽃으로도 상징된다.] 제한속죄설은 또 여타 4대 교리와 구조적/내적으로 상호연계돼 있다.

제한속죄설에 내포된 요소

칼뱅주의의 '제한속죄설'은 다음 사항들을 포함, 또는 잠정적으로 내포한다.

예수님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채찍형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피 흘리셨다.
예수님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지 일부 사람들만 위해 수난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죄는 단지 일부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뿐이다.

아울러 칼뱅주의의 '제한속죄설'은 다음 사항들도 간접시사하는 듯 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속죄는 칼뱅주의와 이 제한속죄설을 믿고 제대로
이해하는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칼뱅주의를 굳게 믿는 사람들만 천국에 갈 수 있거나 갈 가능성이 더 많다는 얘기다.

{위는 칼뱅주의자들의 착각이다. 칼뱅주의 교리 자체는 칼뱅주의권 사람들이 생각하듯 성경진리 자체가 아니다. [칼뱅학설=성경]이라고 봄은 가히 이단설에 가깝다! 따라서 그들자신의 입장인 '주권신학'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은 어차피 칼뱅주의 그룹 가운데 얼마, 아르미니우스주의 그룹 가운데 얼마, 여타 그룹에서 얼마의 사람을 구원하실 터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

하지만 필자의 묵상에 따르면, 성경 말씀은 위의 가설/교리와는 거의 정반대 입장이다! 즉 무한속죄와 조건부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들이 너무도 많지만 우선 딱 한 구절만 올려 보자. [이 성구는 필자가 칼뱅주의의 문제점을 갖고 오래 고민하던 끝에 영감처럼 번개 같이 눈 앞에 튀어 나온 구절이다.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감화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또 그 분은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 그런데 우리들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죄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서신A 2:2 사역).

위 구절은 원문을 눈 씻고 봐도 그대로다. 잘못된 구절이 아니다. 요한은 위 구절 뒷 부분에서, 영어의 'not only..but also'와 같은 그리스어 관용구 '우..데 모논..알라 카이'를 씀으로써 화목제물이신 주님이 단지 (구원받을) 우리들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위한 분이었다고 단언한다.

칼뱅주의자들은 위 구절을 무척 싫어하고 꺼린다. 칼뱅주의 5대 교리의 하나인 제한속죄설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탓이다. 사도 요한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십상이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위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능히 깨닫지도 못한다. 여기서 칼뱅주의자들이 혼동/착각하는 점은 무한속죄가 곧 보편구원을 뜻함이 아니며, 따라서 무한속죄는 조건부 구원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칼뱅주의자들이 그토록 추앙해 온 칼뱅 자신은 과연 위 구절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시리즈 다음 편에서 상론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본론에 앞서 몇 마디 머릿글로 열고 있다.

성경말씀 앞에서 실족 말아야


주님은 침례/세례요한을 지칭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셨다. 요한이 하마트면 실족하여 예수님을 거의 오해할 뻔 했기 때문이다.

페트로는 경고한다. 성경 말씀을 제멋대로 억지로 풀다간 자칫 망한다고. 우린 성경말씀을 나의 양식으로 삼고 날마다 묵상하되, 그 말씀을 제멋대로 찧고 까부르고 장난쳐선 안된다. 성경 갖고 그냥 놀아선 안 된다는 얘기다.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과 영감으로 우리 속에 날이 새고 샛별이 뜨기까지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페트로B 1:19).

말씀 묵상 때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주의할 사항은 [성경말씀 자체와 성령의 감동을 벗어나] 함부로 사사로이 풀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예언은 언제나 사람의 뜻이 아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에 똑 같은 성령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페B 1:20~21).

페트로는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잇는다.

"..우리의 사랑받는 형제 파울도 그에게 주어진 지혜를 따라 여러분에게 [글을] 썼고, 또 모든 편지에서도 이런 것들을 말했는데, 그 중엔 깨닫기 어려운 것도 더러 있으니 무식한 이들과 불안정한 사람들이 딴 성경처럼 그것들도 뒤틀어 풀다가 자멸하게 됩니다."(페B 3:15b~16)

이 경고는 우리 누구나 받아야 할 경고이며, 칼뱅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위대한 칼뱅도 흔히 실족하곤 한다. 너무 자주 혼동한다. 하나님을 절대주권자로 절대숭앙하다 못해 자신을 절대주권자로 착각(?)했는지 스스로 판관 자리에서 간접 살인도 했다. 침례/세례 요한도 실족할 뻔 했는데 칼뱅이야 오죽하랴. 신학 사상과 교설은 성경 진리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고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스승에게 배운 신학 사상과 온갖 교설들이 다 성경과 맞먹거나 버금가는 진리라고 굳게 믿는 특성이 있다. 그런 현상은 칼뱅주의자들이 칼뱅의 학설 내지 교설을 (5대) '교리'로 정립한 것으로 입증된다. 그것은 칼뱅을 단순히 존중해서가 아니라 성경 이상으로 받들어, 우상숭배를 한 결과다. 바로 그 점을 저쪽 세계의 칼뱅 선생께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문제는 이 세상에 칼뱅주의 교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칼뱅주의권 사람들도 있지만, 정반대 성격의 교리로 맞서온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칼뱅주의와 함께 신교 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르니미우스주의권이 바로 그것이다.

골고루 내리는 햇빛과 비

주님은 침례/세례 요한 때부터 천국이 침공을 당해 왔다고 말씀하신다. 천국은 침공하는 이들이 먼저 뺏는다. 칼뱅주의자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든 간에, 시쳇말로 믿음으로 '땅 따 먹기'를 하는 자가 땅 '임자'라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제공된 천국이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음을 본다.

무한속죄와 조건부 적용, 조건부 구원의 원리는 낱말은 어려운 것 같은데 실은 퍽 간단하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 말씀을 하신다. 무한속죄와 조건부 적용은 이 성구에서 잘 이해된다.

"..그 분(아버지)은 그 분의 태양을 악인들과 선인들 위에 떠올리시고, 비를 의인들과 비 의인들 위에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오."(마5:45b. 사역)

위 구절은 하나님이 온전하심을 햇빛/햇볕과 비로써 증거해 준다. 햇빛과 비는 일부러 양산이나 우산으로 가리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나 혜택이 간다. 주님의 보혈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보혈을 일부러 피하고 거부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다 영향을 받는다. 소금과 빛의 은유도 같은 맥락으로 풀어 볼 수 있다(마4:15,16).

위 구절이 포함된 앞뒤 문맥(마5:43~48)을 보면, 원수와 박해자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형제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문안도 해야한다고 시사하시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온전하시듯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주님이 단지 택하신 자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시고 속죄하셨다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과연 어디 있는가? 우리들만 위해 '제한속죄'를 하셨고 지금 하신다면, 이 구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모순되지 않는가.

제공과 반응의 역학구조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제공(offers)과 인간의 반응(reactions/response)이라는 쌍방향/양방 인터액션(interactions)의 역학 구도로 시종 일관한다. 무한속죄는 조건부 구원과 모순되지 않는다. 단지 제공과 반응의 차이일 뿐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무한속죄(Unlimited Atonement)와 동시에 조건부 구원(Conditional Salvation)을 말한다. 칼뱅주의자들은 무한속죄가 곧 보편구원에 연결된다고 우려하지만, 기우에 불과하다. 성경은 노먼 빈슨 필, 빌리 그래엄, 라벗 슐러의 생각처럼 무조건적 구원이나 보편구원, 또는 만인구원설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무한속죄와 만인구원은 전혀 성격이 다른 문제다. 조건부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동시에 인간 의지의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절대주권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구속하시지 않는다. 즉 원하지도 않는 구원을 강제로 시켜주시진 않는다는 뜻이다.

칼뱅주의는 스스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 미캐닉스(mechanics)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글의 진도에 따라 차차 이해될 테지만, 칼뱅 자신이 무척 헷갈렸다(!). 아마도 칼뱅이 너무 높은 개혁 강단에서 주로 아래를 내려다 본 나머지 하나님의 시각에서 성경을 많이 본 모양이다. [주님 자신, 하나님의 시각만으로 머물지 않으시려고 낮게 땅으로 몸소 내려 오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즉 오픈돼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주권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오직 예수 크리스토를 유일한 구주, 유일한 길, 진리, 생명으로 받아 들여야만 가능하다. 즉 독자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독자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토의 속죄 역시 [위 요한서신A 2:2에서 보듯]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뜻에 따라 누구에게나 적용되게 온 세상 앞에 활짝 열려있다. 문제는 인간 편에서의 반응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속죄 받고 있진 않다. 독자가 죄 사함(속죄)을 받고 안 받고는 크리스토 앞에 나와 엎드려 믿음을 고백하느냐, 않느냐 라는 독자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무한속죄 교리는 조건부 구원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온 세상': 칼뱅은 사도 요한과 정반대!


-칼뱅주의 주요교리 비평 <2>

[이 글을 읽기 앞서 필자의 시리즈 첫 글('성경은 무한속죄와 조건부 구원을 말한다')를 읽어 주기 바란다. 이 글은 성경과 칼뱅 주석 본문만을 참조했다. 필자는 아르미니우스주의권에서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그 이즘에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이 글은 일방적인 칼뱅주의 폄하, 아르미니우스주의 고취 어젠다로 쓰는 게 아니다.]

필자는 앞 글에서 요한서신 알파(=요일) 2장 2절이 칼뱅주의의 '제한속죄'설과는 달리(!), 무한속죄를 웅변해 준다고 입증한 바 있다. 궁금한 것은 이 구절에 대한 칼뱅 자신의 견해는 어떠냐는 것이다. 그래서 칼뱅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그의 주견을 분석해 본다.

필자가 인용하는 칼뱅의 요한 서신 주해는 [라틴어/불어 원문을 영국의 칼뱅주의자] 존 오웬 목사가 번역한 텍스트를 사용한다. 우선 다음은 칼뱅 자신의 본문 번역을 다시 옮긴 것이다.

2절: 또한 그 분(예수)은 우리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들만 위하지 않고, 온 세상의 죄들도 위함입니다.

아래는 윗 구절에 대한 칼뱅의 주해 전문이다. [한글 번역은 필자의 것: 칼뱅의 요한서신 주해는 야코보서, 페트로서 A/B, 유다서와 함께 칼뱅이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에게 보내는 헌사가 붙어 있다. 이 점을 감안해 번역했다.]

"그리고 우리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이를 확대하기 위하여 덧붙이십니다. 크리스토가 이루신 속죄가 믿음으로 복음을 끌어 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됨을 신도들이 확신할 수 있게 말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온 세상의 죄가 속죄돼 왔느냐란 물음이 떠 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갖고 구원을 모든 타락자들에게까지, 그래서 사탄에게까지 확대하려는 광신자들의 망령을 그냥 지나치겠습니다. 그런 괴이한 주장은 반박할 가치도 없습니다.
이 불합리성을 피하려는 이들은, 크리스토께서 온 세상을 위해선 넉넉히, 그러나 택한 자들을 위해서만 효과적으로, 수난하셨다는 말들을 해 왔습니다. 그런 해명설이 여러 학교에 폭 넓게 유포돼 왔습니다. 저는 그런 설이 참되다고 시인하지만, 이 구절에 걸맞다는 견해는 부정합니다.
사도 요한의 의도는 이 [속죄] 혜택을 다름 아닌 온 교회(the whole Church)의 공동 혜택으로 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all) 또는 '온'(whole)이란 용어로써 요한은 타락자들을 포함시킨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토의 은혜는 세상의 유일한 참된 구원임이 선포될 때에야 걸맞다는 사실이 명확해집니다."

칼뱅의 등식: 온 세상=교회

믿는 자들은 두 세 사람만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도 교회다. 거듭난 온 세상 신자들은 비가시적 교회다. 그런데 온 세상과 온 세상 신자들은 엄연히 다른 극과 극의 두 개념이다. 사도 요한이 본 절에서 '온 세상'을 교회로 시사한 듯한 암시는 눈 씻고 봐도 없다.

그러나 칼뱅은 여기서 신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개념 상의 모순과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 [필자는 (예수님 아닌) 칼뱅을 필자와 다름 없는 범인(보통사람)으로 생각한다.] 바로 세상=교회, 교회=세상 이라는 놀라운 등식! 교회와 온 세상을 동일시하고 있음이다.
더구나 번역자 오웬은 한 술 더 떠, 칼뱅의 주석 본문 아래에다 칼뱅주의자 필립 도드리지의 견해를 각주로 포함시켰다. "내 견해로는, 사도(요한)가 온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유대인들이든 이방인들이든-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칼뱅 자신과 그 후학들은 주님이 분명히, 철저히 교회와 구분하신 세상을 교회=세상 등식으로 혼동하고 있다. 등식이니까 좌변과 우변을 바꿔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것은 성경 진리에 대한 엄청난 오류요 혼동이요 착각이다. 아전인수 격 해석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명시하셨다. 세상의 임금과 신은 마귀라고 명시하셨다. 주님과 그 분의 사도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세상=교회] 또는 [교회=세상]이라고 동일화 한 적이 없다. 독자가 그런 개념을 내포/암시하는 구절을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필자에게 보여 주기 바란다.

사도 요한의 부등식: 온 세상≠교회

칼뱅의 첫이름은 '장'(Jean), 즉 요한이다. 그런데 같은 구절에 대한 두 요한의 견해는 정반대다! 사도 요한은 같은 서신, 같은 장에서 엄연히 교회와 세상을 극과 극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바로 몇 구절 아래서 그렇다.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이하 16,17절도 참조. (한글 개역)]

이 2:2 성구를 기록한 요한이 과연 온세상=교회 란 식의 등식을 추호라도 사용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같은 서신의 다음 구절로도 자명해진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일5:19)

사도 요한이 보는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곳"이다. 즉 세상 신인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곳이다. 교회가 아니다! 요한이 코스모스라는 낱말 갖고 여기서는 악한 세상, 저기서는 교회 또는 신자들로 지칭하여 사용한 바 없다. 그런 이율배반은 신자들을 헷갈리게 만들며 엄청난 결과를 자초한다. 그런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구절과 2:2을 결부시켜 보면, 칼뱅의 주해는 정작 요한과는 전혀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칼뱅은 이런 단순한 귀결조차 착안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도대체 온 세상은 온 세상 교회 또는 신자일 수 없다! 이 낱말-'세상'의 범위와 개념을 '엿장수 맘대로'식으로 끝없이 풀어 나가는 것은 칼뱅주의 학자들의 자유이겠지만 [칼뱅주의자들은 자유의지 개념을 절대 반대하면서도 자신들은 제멋대로의 성서해석 자유를 누린다!], 요한은 2절과 15~17절에서 똑같은 '코스모스'를 쓰고 있다.
그런데 칼뱅은 2절의 코스모스만은 교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오! 도대체 이런 견해를 우리 신자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위 주해에서 최소한 분명해지는 것은 칼뱅은 사실상 요한의 본문이 아닌 자신의 해석과 주견을 절대 신념으로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현상은 사실 칼뱅 주석과 기독교 강요 전체에 고루 나타난다.

세상=교회 -이런 견해는 칼뱅 자신이 꾸짖은 싸탄과 같은 견해다! 지상교회를 '하늘 왕국'으로 삼아온 카톨릭에서 별로 진화/발전하지 못한 미성숙한 견해인 것이다. 교회와 세상을 완전히 혼동하고 있다.
여기서 칼뱅이 왜 지상의 주권 '신정국가'를 지향했는지 어렴풋이 유추해 볼 수 있다. 변호사/법률가 출신인 칼뱅은 법적 권세로 지상에 교회 즉 천국을 건설할 수 있을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카톨릭 교회를 지상의 주권 국가로 정립할 수 있을 줄 착각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받은 영향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칼뱅주의는 물론 카톨릭의 신학적 배경도 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터. 칼뱅주의 외엔 모조리 '이단'이라는 식의 발상은 카톨릭 외엔 다 거짓 교회라는 카톨릭 지상주의를 연상시키곤 한다. 그 정도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권적이다.

칼뱅의 부등식: 우리≠온세상 신자들(!)

칼뱅/도드리지는 또 이 구절에서 '우리'와 온 세상(그가 정의한 '모든 신자들')을 구분하고 있다. 자신도 미처 못 깨닫는 심각한 개념과 범주, 논리의 오착과 혼동이다. 도대체 여기서 칼뱅이 생각하는 '우리'란 누구일까? 제네바 신자들? 아니면 그가 사역을 담당했던 생 피에르 교회 교인들? '우리'라고 했으니 에드워드 국왕의 영국 교회를 포함한 유럽 신자들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온 세상은 한국 등 유럽이 아닌, 세상 딴 지역의 이방(?)을 가리키는가?
뭐, 아니면 그 중의 하나라고 치자. '우리'는 온 세상 신자들의 범주에 포함되는가, 포함되지 않는가? 포함되든 안 되든 칼뱅은 중대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타 분석

칼뱅의 위 말을 재인용하면..
"이 불합리성을 피하려는 이들은, 크리스토께서 온 세상을 위해선 넉넉히, 그러나 택한 자들을 위해서만 효과적으로, 수난하셨다는 말들을 해 왔습니다. 그런 해명설이 여러 학교에 폭넓게 유포돼 왔습니다. 저는 그런 설이 참되다고 시인하지만, 이 구절에 걸맞다는 견해는 부정합니다."

위에서 칼뱅 자신, 크리스토의 수난이 온 세상을 위해 넉넉하다는 당대의 폭 넓은 견해를 받아 들인다곤 하나 단 이 성구에만은 적용할 수 없다는 특이한 입장임을 본다. 왜 이 성구만일까? 그 까닭은 밝히지 않는다. '제한속죄' 개념을 부정한 가장 핵심적이고 파워풀한 성구의 하나인 이 구절에만 적용할 수 없다는 데 숨은 어젠다가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그는 정직하지 못하며 의혹을 남긴다.

위에서 이미 교회개념으로 풀었듯, 칼뱅은 '온 세상'을 '믿음으로 복음을 끌어 안는 모든 사람들'로 일방적으로 국한시킨다. 즉 후기 칼뱅주의자들의 모든 변명에도 불구하고 칼뱅 자신은 [온 세상=신자들]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한속죄설'의 본래 의미가 확실해진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의도 즉 성령의 의도를 무섭게 왜곡한 것이다!

또한 위 주석 앞 부분에서 왜 칼뱅이 '제한속죄' 개념을 강조하는지 자명해진다. 그는 보편구원을 무한속죄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보편구원을 말하지 않을 뿐더러 '제한속죄'를 말하지도 않는다. 단지 온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제공해놓으신 주님의 무한속죄를 받아 들이느냐, 받아 들이지 않느냐 라는 인간의 반응의 조건에 따라 구속의 파워가 적용될 뿐이다.

칼뱅은 온 세상, 심지어 싸탄까지도 크리스토의 피로 구원받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런 우려와 과장된 표현들은 심지어 우습기까지 하다. 그리고 칼뱅은 결과적으로 성경 진리 자체를 "괴물 같다"(monstrous)고 표현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 견해를 은연 중 성경보다 월등히 높이는 결과를 자초하는 대목이 어찌 아닐손가.

'제한'이란 딱지만 떼어도..


김삼

칼뱅주의자들과 칼뱅주의권 사람들은 '제한속죄'의 '제한'(Limited)이라는 딱지 때문에 여러 모로 안 봐도 될 손해, 아니 안 봐야 했을 손해를 많이 봐 왔다. 이를테면 일종의 위험한 노랑 간판 격이다. 'Limited'에는 '유한'이란 개념도 있는 탓에 예수님의 전능하고 위대한 속죄의 권능을 유한스럽게, 축소시키고 위축시키는 듯한 인상이 노골적으로 들기 때문이다. 뉘앙스가 그렇다.

없어도 되는 딱지인데, 체제와 전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는 양 보인다. '제한속죄'란 개념은 구구하고 무성한 온갖 오해만 낳을 뿐, 절대 진리인 성경 구절의 설명엔 별 도움이 안 된다. 이해해 보려고 해도 개념 자체가 우선 모호하다. 독자도 칼뱅주의자인가? 무조건 반감만 갖지 말고, 우리 왜 그런지 정신 차린 맘으로 살펴 보자.

개혁교회사를 보면, 사실 칼뱅주의자들은 '제한속죄'의 개념만 갖고 있던 중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그룹들이 이른 바 5대 교리란 것을 들고 나오자, 초강력 대응책으로서 네덜란드 도르트 회의에서 상대적으로 '제한속죄'론을 배타적 개념으로 굳혀 버렸다.
그런데 제한속죄에 대한 후기 칼뱅주의자들의 견해는 천태만상이다. 말하자면, 제한속죄 개념 자체가 열려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정통 골수 칼뱅주의자들의 견해는 "제한속죄는 어디까지나 제한속죄, 끝!" 이다. '묻지 마'식 절대 제한속죄론이라 할 수 있겠다. 없는 것 같아도 그런 칼뱅주의자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 사실 도르트 회의 사람들의 주 동기가 그랬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무조건 이단! 추방!" 이란 포석이었다.

그런가 하면, "예수 크리스토의 피는 만민을 속죄하기에 넉넉하나 그 적용은 제한돼 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결과적으로 제한속죄가 아니냐?" 라고 비교적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칼뱅주의권 사람도 있다. 위에서 앞 부분만 '무한속죄'란 용어로 바꿔 주기만 하면, 개념 상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간 '보편구원' 쪽으로 치닫는다고 우려하면서 이 역시 '제한' 쪽으로 꼬리를 묻는다.

그런데 무한속죄 [아니라면 만민에게 오픈된 속죄] 가 제한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은 신자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단지 그래서 꼭 '제한속죄'여야 한다면, 구태여 '제한'이란 개념 자체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무엇을 위한 제한인가? 칼뱅주의자들만을 위한 제한인가?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처럼 예정 안에서 선택된 자들의 빛을 드러내기 위한 제한인가?

'제한' 딱지는 오히려 끝없이 복잡다단한 오해만 야기시킬 뿐이다. 왜 칼뱅주의권은 그런 개념을 일부러 간판과 딱지로 만들어 스스로 사서 고생하는가? 꼭 그래야만, 절대주권, 예정과 무조건 선택에 부합되는가? 그렇다면 자칫 사상누각이 돼 버릴 수 있다. [벽돌 하나만 빠져 버리면..우르르..?!] 제한속죄는 결국, 단지 체제 유지를 위한 명목 상의 '벽돌'인가? 아니면 딴 부분은 다 무너져도 절대 고수해야 할 생명 같은 모퉁이돌인가?

또, "예수 크리스토의 구속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기로 내정돼 있었고 주님은 그 계획대로 실천하셨다." -뭐, 이런 본질론적 파생설 비슷한 것도 있다. 이 역시 절대 주권 관점과 예정론 체제에 스스로를 묶는 유의 속죄론이겠다.

그 외에도, 제한속죄론 '딱지', 아니 이 위험한 '노랑 간판'에 대한 또 다른 다양한 관점과 복잡한 해설들이 갈래를 짓고 있다. 즉 보편타당하고 응축된 개념이 아니란 반증이다.
더 놀라운 것은 칼뱅 자신이 이 개념에 관해 스스로 헷갈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글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알고 보면, 장 칼뱅 자신이 '제한속죄'보다는 '무한속죄' 쪽으로 더 기운 사람이다. 칼뱅주의권 사람들이 알면, 놀라 나자빠질 얘기다. 필자도 이미 한번 나동그라질 뻔 했으니까. 그러나 이 엄청난 비밀(?)에 관해서는 요 다음번 글을 위해 아껴 두련다. 자인할 줄 아는 칼뱅의 그 용기가 존중스럽다.

필자는 처음부터 칼뱅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수많은 칼뱅주의권 교회에 고의적으로 손해를 끼치려고 필을 든 게 아니다. 칼뱅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 칼뱅절대주의, 칼뱅우상주의, '칼뱅 짱!' 주의를 버리고 어디까지나 유일한 진리인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오자는, 예수 크리스토의 진리에 대한 의존도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인간 의존적 영성은 어디까지나 심적/심리적/프쉬케적 영성이지, 성령이 원하시는 참된 의미의 영적/프뉴마적 경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칼뱅 교리가 절대 옳다고 우기며 칼뱅 또는 칼뱅 사상 체계를 높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헨리 나웬, 빌리 그래엄, 라벗 슐러, 릭 워렌을 무조건 또는 거의 무조건 신뢰해주는 것이나 진 배 없다. 그 반대로 예수 의존주의, 성경말씀 절대의존주의는 늘 안전하다. 성경의 실 저자이신 성령의 기름부음만 유지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칼뱅주의자들은 천국 대문 문지기 자리를 독차지(?)한 듯한 몸짓은 그만 둬야 한다. 그 역시도 '노랑 간판'처럼 배타적이고 위험하다. "너 믿는 건 나 믿는 것과 달라. 넌 이단이니 꺼져!" 이런 식의 태도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과 상관 없다. 바로 그런 것이 전형적인 흑백논리, 획일주의다. 그건 고지식이고, 기본적인 학문적 태도 조차도 못된다.

물론 성경 진리는 흑백이 분명하다. 그러나 칼뱅 교리가 어디 성경인가? 어떤가? 칼뱅 교리는 칼뱅의 사상 위에 기초한 학설이고 이론이고 신학체제이지, 그것 자체가 성경의 진리가 아니란 얘기다. 만일 그렇다고 우긴다면, 그야말로 [성경에 의하면] 이단/삼단이다! 안 그래도 칼뱅주의가 '이단'이라고 떠드는 목청이 교계 일각에 있어 왔다. 그런 소리를 들을 필요 있겠는가? 눈을 들어 칼뱅을 보지 말고 오직 예수 크리스토를 바라 보라. 칼뱅주의 기둥이 아닌 성경 말씀의 진리 등대를 올려다 보라.

우리는 거창하고 드높은 사상누각을 세우려고 머리를 쓰기 전, 상식 차원의 낮은 터에서부터 머리를 굴려야 좋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신학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다 라는. 학문의 전당은 이성의 전당이지, 진리의 전당은 아니다. 모름지기 진리의 전당이려면, 말씀을 최고 우위에 놓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말씀을 우위에 놓는다는 말은 말씀으로 모든 학설을 체질하고 여과시켜 버릴 것은 버린다는 뜻이다.

칼뱅도 결국 무한속죄 지지


칼뱅주의 주요 교리 비평 <3>

칼뱅 자신도 결국 무한속죄를 지지했다.
그의 '유언장 및 유산처분서'(Last Will and Testament)에서 입증되는 사실이다. 1564년 4월25일 그의 공증인인 제네바 시민 피에르(또는 '페테르') 슈날랏에게 받아 적게 한 것. 칼뱅은 유언 작성 약 한 달 후 5월27일 세상을 떠났다. 과히 길지 않은 이 유언장은 종국을 앞둔 칼뱅의 절절한 심경을 엿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로운 문서다.

칼뱅은 유서 작성 이튿날인 4월26일 카농 거리의 자기 집으로 테오도르 베제, 레이몽 쇼베, 미셀 콥, 루이 에녹, 니콜라 콜라동, 자크 보르드 등 그가 사역하던 생 피에르 교회의 모든 사역자/설교자들과 앙리 스크랭제 교수, 온 제네바 시민들을 불러모아 슈날랏에게 이 유언을 큰 소리로 낭송하게 하고, 주요 증인들에게 손으로 서약/확인시켰다. 따라서 한 달 후 죽기까지 유언장에 나타난 그의 심중은 별로 바뀌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유언 중 해당 부분이다.
[원문은 헨리 베버리지(Henry Beveridge, Edinburgh, 1844)의 영문판을 참조했다. 참고: 칼뱅의 친구/후계자인 개혁가 테오도르 베제는 그의 '칼뱅의 삶'에서 본 유언을 프랑스어/라틴어로 게재했다.]

".. 나는 또 증언하고 선언합니다. 나는 주님께 애타게 간청합니다. 그 분이 그러기를 기뻐하신다면, 나의 주권자, 구속자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흘리신 그 피로 나를 씻어 깨끗케 하시고,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그 분의 그림자 아래 설 수 있도록.." (필자 역)

여기서 칼뱅이 말한 '인류'는 지상의 온 교회가 아니다. '택한' 인류, 즉 신자들만을 말하지도 않는다. 칼뱅이 이 부분에서 분명히 무한속죄를 지지했음을 우리가 솔직히 시인해야 옳다. "아니다"고 우기지 말아야 한다. 인류면 모든 인류이지, 딴 뜻으로 말했겠는가. 그런데도 이 유언장의 어느 한글 번역문은 원문을 상당히 왜곡시켰다.

앞서 필자의 글 '온 세상: 칼뱅은 요한과 정반대'에서 소개했듯, 칼뱅은 그의 요한서신 주해 2:2[칼뱅은 요한서신 제1서만 주석했다] 등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이 무한속죄 개념 자체를 절대 반대 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비쳤다. 그가 우려하고 결사 반대했던 것은 온 인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소위 보편구원론이다. 칼뱅은 물론 우리도 모두 다 함께, 보편구원론을 반대한다! 필자는 다양한 글 꼭지를 통해 현대 교계에 팽배한 보편구원론을 비판해온 바 있다.

물론 보편구원론은 성경적으로 엄격히 이단이다! 성경은 결코 모든 인류가 구원 받는다고 하지 않는다. 보편구원론 입장을 견지하는 대표적인 교파는 유니버설 교회(Universal Church)이며 근래에 성삼위일체를 반대하는 단일신론파 유니테리언 교회(Unitarian)와 합세해, 단일신 보편구원교회(Unitarian Universalist Church)를 이뤘다. 이 교파의 일부는 칼뱅의 주도 하에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처형된 미구엘 세르베토를 교주로 삼고 있다.

현대인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보편구원론 쪽으로 기운 사람은 카톨릭 계열의 토머스 멀튼, 헨리 나웬, 테레사 수녀 등 무수히 많고, 신교계 쪽은 노먼 빈슨 필, 빌리 그래엄, 라벗 슐러 등이 보편구원론 쪽에 가깝다.